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1147년에 태어나 1199년에 사망한 일본의 무장이자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쇼군이다. 그는 1180년 고시라카와 천황의 칙명을 받아 다이라 씨에 대항하여 거병했으며, 이시바시야마 전투에서 패배한 후 세력을 재건하여 겐페이 전쟁에서 승리했다. 요리토모는 가마쿠라에 막부를 세워 무사 정권을 수립하고, 일본 봉건 시대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를 제거하는 등 냉혹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지만, 겐큐 신제를 통해 정치적 기반을 다지고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어 막부 체제를 확립했다. 요리토모의 사후, 가마쿠라 막부는 680년간 지속되었으며, 그의 업적은 일본 역사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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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시 - 호조씨 호조 씨는 간무 헤이시에서 분파된 일본 씨족으로,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싯켄직을 세습하며 막부의 실권을 장악했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외척으로서 영향력을 확대, 쇼군을 보좌하며 막부 안정을 꾀했으나 권력 남용 등으로 막부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했으며, 몽골의 일본 원정 당시 국방을 성공적으로 지휘하고 고세이바이시키모쿠 제정과 같은 행정적 업적을 남겼다.
가마쿠라시 - 가마쿠라 공방 가마쿠라 공방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간토 지방 통치를 위해 아들 아시카가 모토우지를 가마쿠라로 보내면서 시작된 무로마치 막부의 지방 통치 기구이자 그 수장을 가리키며, 간토 간레이의 보좌를 받아 간토 10개 국을 다스렸으나 막부와 대립, 이후 고가 공방의 등장과 새로운 가마쿠라 공방 파견으로 복잡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자녀 - 미나모토노 요시쓰네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는 겐페이 전쟁에서 활약했지만 이복형과의 갈등으로 자결한 비극적인 무장으로, 일본 대중문화에서 영웅적인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자녀 - 미나모토노 노리요리 미나모토노 노리요리는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동생으로서 겐페이 전쟁에서 활약했지만, 요리토모의 경계로 유배 후 살해되었다는 설이 있는 인물이다.
1147년 출생 - 다이라노 무네모리 다이라노 무네모리는 헤이안 시대 말기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아들이자 헤이케 정권의 수장으로, 기요모리 사후 헤이시 일문을 이끌었으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패배하여 몰락, 단노우라 전투 후 처형되었으며,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헤이케 멸망의 원인으로 평가받는다.
1147년 출생 - 와다 요시모리 와다 요시모리는 헤이안 시대 말기에서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도와 겐페이 전쟁에서 활약하며 가마쿠라 막부의 유력 고케닌이 되었으나, 호조 씨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여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기본 정보
후지와라노 다카노부가 그린 초상화, 1179년
일본어 표기
title: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alphabet-type: 로마자 alphabet: Minamoto no Yoritomo kana: みなもと の よりとも kanji: 源賴朝 hangeul: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규안(久安) 3년(1147년) 4월 8일에 미나모토노 요시토모의 셋째 아들이자 적자(嫡子)로서 오와리국 아쓰타(熱田, 지금의 일본 나고야시 아쓰타 구)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귀무자'''(鬼武者|오니부샤일본어) 또는 '''오니타케마루(鬼武丸)'''[115]이다. 어머니는 요시토모의 정실로 아쓰타 신궁의 오구지(大宮司) 후지와라노 스에노리의 딸인 유라 고젠이다.[116]
아버지 요시토모는 세이와 천황을 시조로 하며, 가와치국을 본거지로 4대에 걸쳐 도고쿠에서 세력을 쌓아 겐지 무사단을 형성한 가와치 겐지의 도료였다. 요시토모는 호겐 원년(1156년)의 호겐의 난에서 다이라노 기요모리와 함께 고시라카와 천황을 따라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요리토모는 그때 아버지를 따라 온조시(御曹司, 후계자라는 뜻)로서 관직을 역임했고, 호겐 3년(1158년)에는 고시라카와 천황의 준모(准母)[117] 로서 황후궁에 든 무네코(統子) 내친왕을 섬겨 황후궁권소진(皇后宮權少進)이 되었다. 헤이지 원년(1159년)에 무네코 내친왕이 쇼사이몬인(上西門院)의 원호를 선하받은 뒤에는 쇼사이몬인 구로우도(上西門院藏人)로서 섬겼다. 또한 그 해 1월에 우효에노쇼칸(右近衛將監), 6월에는 니조 천황의 구로우도(藏人)로 보임되기에 이른다. 이는 관직이 없었던 맏형 요시히라(義平), 먼저 관직에 나간 둘째 형 도모나가(朝長)보다도 빠른 승진이었다.[118]
요리토모는 미나모토 씨(세이와 겐지)의 상속자인 미나모토 요시토모와 아쓰타 신사의 제사장이자 강력한 후지와라 씨의 일원인 후지와라노 스에노리의 딸인 유라 고젠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아들이었다. 요리토모는 아쓰타 신사 서쪽에 있는 가문의 별장, 아쓰타, 나고야, 오와리국(현재의 세이간사)에서 태어났다.[4][5][6] 당시 그의 할아버지 미나모토노 타메요시는 미나모토 씨의 당주였다. 그의 어린 시절 이름은 '''오니와카마루'''(鬼武丸)였다. 그는 세이와 천황의 후손이었다.[1]
1156년, 궁정 내의 당파 분열이 교토에서 공개적인 전쟁으로 번졌다. 은퇴한 도바 천황과 그의 아들 고시라카와 천황은 후지와라 섭정 후지와라 다다자네의 아들 후지와라 다다미치와 다이라노 기요모리(당시 다이라 씨의 상속자)를 지지했지만, 은퇴 천황 스토쿠는 다다자네의 막내아들 후지와라 요리나가를 지지했다. 이것을 호겐의 난이라고 한다.[7]
미나모토 씨는 분열되었다. 씨족의 당주 타메요시는 스토쿠를 지지했지만, 그의 아들 요시토모(요리토모의 아버지)는 도바와 고시라카와, 그리고 기요모리를 지지했다. 결국 고시라카와의 지지자들이 내전에서 승리하여 요시토모와 기요모리의 승리를 확보했다. 스토쿠는 가택 연금되었고, 요리나가는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었다. 타메요시는 요시토모의 군대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시라카와와 기요모리는 무자비했고, 요시토모는 미나모토 씨의 당주가 되었고, 요리토모는 상속자가 되었다.[7]
요리토모와 미나모토 씨는 아버지 쪽으로 황실에서 내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토에서는 이제 기요모리의 지휘 아래 있는 다이라 씨와 요시토모의 지휘 아래 있는 미나모토 씨가 다시 당파를 형성하기 시작했다.[7]
4년 후, 기요모리는 신제로도 알려진 후지와라 미치노리를 지지했지만, 요시토모는 후지와라 노부요리를 지지했다. 이것을 헤이지의 난이라고 한다. 그러나 미나모토는 준비가 잘 되어 있지 않았고, 다이라가 교토를 장악했다. 신제의 저택은 다이라에 의해 공격받았고, 신제는 도망쳤지만 곧 잡혀 목이 잘렸다. 다이라가는 그 후 전직 천황의 궁전을 불태워 미나모토를 패배시켰다. 요시토모는 수도에서 도망쳤지만 나중에 가신에게 배신당해 처형되었다.[7]
그 여파로 미나모토와 그들의 동맹국들에게 가혹한 조건이 부과되었다. 요시토모의 세 명의 어린 아들만이 살아남았기 때문에 기요모리와 다이라 씨는 이제 일본의 명실상부한 지도자가 되었다.[7] 미나모토의 새로운 당주인 요리토모는 기요모리의 계모의 간청으로 처형되지 않았지만 유배되었다. 요리토모의 형제인 미나모토 노리요리와 미나모토 요시츠네도 살아남았다.[8]
요리토모는 유배 생활 중 자랐다. 그는 호조 도키마사가 이끄는 호조 씨와 결혼하여 도키마사의 딸인 호조 마사코와 결혼했다.[8][7] 한편, 그는 교토의 사건에 대해 통보받았다.[9]
헤이지의 난(1159년)에서 아버지 요시토모는 후지와라노 노부요리와 함께 고시라카와 상황과 니조 천황을 궁궐에 가두었다. 당시 13세였던 요리토모는 우효에노스케(右兵衛權佐)[119]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상황과 천황은 탈출에 성공하고,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관군'으로서 궁궐을 공격하자 요시토모 등은 패하여 교토를 떠나 간토 지방으로 향했다.[33]
1160년 2월 9일, 요리토모는 오미 국에서 붙잡혀 교토의 로쿠하라로 보내졌다.[34]사형이 당연하게 여겨졌지만, 기요모리의 계모 이케노젠니 등의 탄원으로 목숨을 건졌다.[121] 3월 11일, 요리토모는 이즈 국의 히루가코지마(蛭ヶ小島)로 유배되었다.[122]
히루가코지마(시즈오카현 이즈노쿠니시 요코마치)
이즈에서의 유배 생활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124] 유배 생활이었지만, 은인자중하면서 유모 히키노아마와 외가인 아쓰타 다이구지의 원조를 받으며 사냥을 즐기는 등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히키노아마의 사위인 아다치 모리나가가 유배 생활 동안 그의 측근이었고, 겐지 편에 섰다가 영지를 잃고 방랑하던 사사키노 사다쓰나 등 4형제가 그를 섬겼다. 요리토모는 하코네 곤겐과 하시리유 곤겐에 깊이 귀의하여 독경을 게을리하지 않고, 아버지 요시토모와 겐지 일족의 명복을 빌며 지방 무사로서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히키노아마의 조카 미요시 야스노부를 통해 정기적으로 교토의 동향을 파악하는 등 정보 수집도 게을리하지 않았다(《아즈마카가미》).
이토 스케치카의 딸 야에히메와 만나 아들 지즈루마루를 낳았고, 얼마 후에는 현지 호족인 호조 도키마사의 맏딸 호조 마사코와 혼인해 맏딸 오히메를 얻은 것도 유배 생활 동안의 일이었다.[125]
닌난 2년(1167년) 무렵, 21세의 요리토모는 이토 스케치카의 감시 하에 있었다. 이곳에서 도이 사네히라 등이 모여 사냥이나 스모를 벌이곤 했는데, 스케치카가 교토에 간 사이 요리토모는 그의 셋째 딸 야에히메와 사통하여 아들 지즈루마루를 낳았다. 스케치카는 격노하여 헤이케에 알려질 것을 두려워해 지즈루마루를 죽이고 야에히메를 다른 이에게 시집보낸 뒤 요리토모를 죽이려 했다. 요리토모는 이를 전해 듣고 하시리유 곤겐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건졌다. 31세 때, 요리토모는 호조 도키마사의 맏딸 마사코(당시 21세)와 다시 사통하게 되었다. 도키마사는 야마키 가네타카에게 마사코를 시집보내려 했지만, 마사코는 이를 거부하고 요리토모에게 가서 그의 아내가 되었다고 한다. (《소가 이야기》)
2. 3. 거병과 가마쿠라 막부 수립
지쇼 4년(1180년), 고시라카와 법황의 서자였던 모치히토 왕은 미나모토노 요리마사 · 나카쓰나(仲綱) 부자의 요청으로 여러 구니의 겐지들에게 헤이시 추토를 명하는 영지를 내렸다. 4월 27일, 이즈의 요리토모에게도 숙부 미나모토노 유키이에를 통해 그 영지가 전달되었다.[126] 모치히토 왕은 함께 거병했던 미나모토노 요리마사 등과 함께 우지에서 전사했지만, 요리토모는 움직이지 않고 한동안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헤이시가 모치히토 왕의 영지를 받은 여러 구니의 겐지에 대한 추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움직임을 파악하고, 위기를 느낀 요리토모는 마침내 거병을 결의하고 아다치 모리나가를 사자로 도고쿠에 파견, 요시토모 때부터 연고가 있는 반도(坂東)의 여러 호족들에게 거병에 협력해줄 것을 호소했다.[126]
거병의 첫 공격 목표는 이즈의 모쿠다이(目代)[127] 야마키 가네타카였다. 그 해 8월 17일, 호조 도키마사 등은 요리토모의 명으로 니라(韮) 산에 있던 가네타카의 모쿠다이 저택을 습격해 그를 죽였다. 이즈를 장악한 요리토모는 사가미국의 도이노사토(土肥鄕)로 향했다. 따른 것은 호조 요시토키 · 구도 시게미쓰 · 도이 사네히라 · 쓰치야 무네토(土屋宗遠) · 오카자키 요시자네 · 사사키 4형제, 아마노 도카게 · 오바 가게요시 · 가토 가게카도 등이었다. 여기에 미우라 요시즈미 · 와다 요시모리 등의 미우라 일족이 요리토모에 가담하기 위해 미우라를 출발했다. 그러나 이들과 합류하기 전인 8월 23일, 이시바시야마 전투에서 요리토모는 헤이시측의 오바 가게치카 · 시부야 시게쿠니(涉谷重國) · 구마가이 나오자네 · 야마우치슈토 쓰네토시(山內首藤經俊)·이토 스케치카 등 3천여 기에 맞서 불과 3백여 기로 맞섰다가 패하여, 몇 안 되는 종자들을 거느리고 산으로 도망쳤다. 며칠 동안 산속을 도망쳐 다니면서 죽음을 면한 요리토모는 8월 28일에 마나즈루(眞鶴) 곶에서 배를 타고 아와로 향했다(《아즈마카가미》).
쓰루가오카 하치만구 본전(本殿). 가마쿠라의 정비는 이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의 이건에서 시작되었다.
8월 29일, 요리토모는 아와에 상륙했다. 보소(房總)에 세력을 가지고 있던 호족 가즈사 히로쓰네(가즈사노 히로쓰네)와 지바 쓰네타네에게 자신을 찾아올 것을 명했다.[128] 가즈사 · 지바 두 집안의 지지를 얻은 요리토모는 보소 반도에서 북상해 올라가(《아즈마카가미》·《겐페이 성쇠기》)[129], 10월 초에 무사시국에 들어왔고 이곳에서 가사이 기요시게·아다치 도모토가 가세해 왔으며, 한때 적대했던 하타케야마 시게타다나 가와고에 시게요리, 에도 시게나가 등도 따르게 된다. 10월 6일에는 일찍이 요시토모와 형 요시히라가 살았던 땅에 발을 들였다. 가마쿠라였다.
가마쿠라에 무혈입성한 요리토모는 오쿠라에 저택을 지어 가마쿠라의 정치 거점으로 삼고(오쿠라 고쇼大倉御所), 자신의 선조 미나모토노 요리요시가 교토 교외의 이와시미즈 하치만구를 권청해 지었던 쓰루가오카 하치만구를 북쪽 산기슭으로 옮겨, 아버지 요시토모의 보리를 조상하기 위한 소초주인(勝長壽院)의 건립을 실시하는 등 도시 정비를 계속했다. 가마쿠라는 훗날 그가 세우게 될 무사 정권의 본거지로서 발전을 지속해 나갔다.
10월 16일, 요리토모 추토의 선지를 받은 다이라노 고레모리(기요모리의 손자)의 수만 기가 스루가국에 이르자, 이에 맞서 싸우기 위해 가마쿠라를 출발, 얼마 뒤 기세강(黄瀬川)에서 다케다 노부요시, 호조 도키마사 등이 인솔하는 2만 기와 합류한다. 10월 20일, 후지 강(富士川)에서 고레모리군과 대치하지만, 철퇴 도중에 물새가 날아 오르는 소리에 놀란 고레모리군이 패주하면서 요리토모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승리를 얻었다.[130] 다음날에는 교토로 올라갈 뜻을 비치지만, 치바 쓰네타네나 미우라 요시즈미, 가즈사노스케 히로쓰네 등은 히타치 겐지의 사타케 씨(佐竹氏)가 아직 따르지 않고 있으니, 교토 입경보다 먼저 도고쿠를 평정해야 한다고 충고했고, 요리토모는 이를 수용하여 기세 강으로 군사를 돌렸다. 이 날 오슈의 후지와라노 히데히라를 의지하고 있던 이복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쓰네가 그를 찾아왔다.
돌아오던 길에 사가미의 고쿠후(國府)에서 무장들의 훈공에 대한 첫 포상을 행하고, 앞서 포로로 잡았던 오바 가게치카를 처형한 뒤 사타케 히데요시를 토벌하기 위해 다시 가마쿠라를 출발, 11월 4일에 히타치의 고쿠후까지 이른다. 가즈사노 히로쓰네의 활약으로 싸움은 요리토모의 승리로 끝났고, 히데요시는 도망쳤다(긴사성 전투). 요리토모는 히데요시가 갖고 있던 영지를 휘하 무장들에게 훈공에 대한 포상으로 나누어주고 가마쿠라에 돌아와, 와다 요시모리를 사무라이도코로벳토(侍所別當)에 임명했다. 사무라이도코로는 훗날 가마쿠라 막부의 군사 및 경찰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2. 4. 요시쓰네와의 갈등과 오슈 정벌
요시나카는 유키이에나 요시히로와 함께 헤이케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듭했고, 결국 1183년 7월에 헤이시는 안토쿠 천황과 함께 삼종신기를 가지고 교토를 떠나 본거지인 서쪽으로 낙향한다. 요시나카는 대군을 이끌고 교토로 들어와 고시라카와인을 알현하고, 서쪽으로 내려간 다이라노 무네모리 등에 대한 헤이케 추토의 명을 얻었다. 그러나 기강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았던 요시나카의 군대는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았고, 가뜩이나 기근으로 허덕이던 교토의 식량 사정을 악화시켰을 뿐 아니라 요시나카가 차기 왕위 계승 문제에까지 개입하려 든 일로 치천의 군 고시라카와인이나 다른 조정 신료들의 반감까지 사게 된다.[62]
조정과 교토 사람들은 하나같이 요리토모의 상경을 바라게 되었고, 고시라카와인은 요시나카를 헤이케 추토를 핑계로 교토에서 내보낸 뒤 사자를 보내 요리토모에게 상경을 요청했지만, 요리토모는 1183년 10월 7일에 사자를 돌려보내 요청을 거절했다. 우선 자신이 가마쿠라를 비운 사이에 오슈의 후지와라노 히데히라나 히타치의 사타케 다카요시(佐竹隆義)에게 가마쿠라를 공격당할 위험이 있으며, 거느리고 입경한 수만의 기병 때문에 교토가 자칫 소란스러워질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틀 뒤인 9일, 조정은 헤이지의 난 때 박탈당했던 요리토모의 위계를 돌려주고, 14일에는 도카이도와 도산도의 영지를 본래의 혼조(本所)에 되돌려주고 그 지역의 연공과 관물을 요리토모가 도맡아서 거두어 바칠 것이며, 그 명령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요리토모에게 그 처분을 맡긴다는 내용의 선지까지 내려졌다(주에이 2년 10월의 선지).[62]
요리토모의 상경을 염려하던 요시나카는 앞서 윤10월 15일, 헤이케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교토로 돌아와 요리토모 추토의 명을 청했지만 거절당하고, 1183년 11월에 요리토모의 명으로 교토에 파견된 요시쓰네의 군사들이 오미에 이르면서 헤이케와 요시쓰네 사이에 처하게 된다. 요시나카는 인노고쇼(법황의 처소) 쳐들어가서 고시라카와인을 가두고, 고시라카와인을 협박해 요리토모 추토의 선지를 받아냈으며 1184년 1월에는 세이토다이쇼군(征東大將軍)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20일에 미나모토노 노리요리와 요시쓰네 형제가 수만 기를 이끌고 전진해 올라왔고, 결국 요시나카는 오미의 아와즈(粟津)에서 토벌당해 죽었다.
요시나카가 죽은 뒤, 요리토모는 가마쿠라에 있던 그의 적자 요시타카를 살해하고자 했다. 이를 오히메로부터 전해들은 요시타카는 1184년 4월 21일에 여장하고서 가마쿠라를 도망쳤다. 격노한 요리토모는 측근 호리 지카이에(堀親家)에게 명하여 그를 잡도록 했고, 24일에 무사시 국 이루마(入間) 강변에서 요시타카를 죽였다.[133]
요시나카를 토벌한 노리요리와 요시쓰네는 헤이케 추토를 위해 교토를 떠났고, 1184년 2월 7일, 셋쓰국 이치노타니(一ノ谷) 싸움에서 헤이케에 대승을 거두어, 다이라노 시게히라를 잡아 교토로 데리고 돌아왔다. 이 싸움 뒤에 요리토모는 요시쓰네를 자신의 대관으로 교토에 남겨두고, 요시쓰네를 통해 기나이 무사들을 장악하는 데에 몰두했다. 한편으로 시코쿠로 피한 헤이케를 바짝 몰아붙이고자 규슈 · 시코쿠의 무사들에게 헤이케 추토를 요구하는 서신을 전달, 도이 사네히라 · 가지와라노 가게토키를 산요(山陽) 여러 쿠니에 파견한다.
1185년 1월 6일, 서해의 노리요리로부터 자금 및 선박 부족과 간토 귀환을 바라는 도고쿠 무사들간의 불화 등의 문제를 호소하는 서신이 닿았다. 요리토모는 안토쿠 천황이나 겐레이몬인(建禮門院)의 신변 안전과, 군을 움직이지 말고 지쿠시의 무사들에게 부디 반감을 사지 않도록 하라는 서신을 보내고, 규슈 무사들에게는 노리요리를 도와 헤이케 토벌에 협조할 것을 요구했다. 이 상황을 본 요시쓰네는 고시라카와인에게 사이고쿠(西國) 출진을 청해서 허가를 얻었고, 1185년 2월 19일에 사누키국(讚岐國) 야시마(屋島)에 있던 헤이케의 거점을 추토하러 향했다. 26일에는 규슈의 무사로부터 자금과 배를 얻은 노리요리가 스오에서 분고로 건너가는 데 성공한다. 1185년 3월 24일의 단노우라 전투로 안토쿠 천황 등 헤이케 일문이 바다에 투신함으로써 헤이케 일문은 멸망했다. 다이라노 무네모리나 겐레이몬인 등은 사로잡혔다.
1185년 4월 초, 헤이시 추토에서 사무라이도코로쇼지(侍所所司)로서 요시쓰네의 보좌를 맡았던 가지와라노 가게토키로부터, 요시쓰네를 탄핵하는 서신이 닿았다. 4월 15일, 요리토모는 자신의 허락도 없이 조정으로부터 무단으로 관직을 임명받은 간토 무사들을 일일이 비난하며 도고쿠 귀환을 금지해버렸다(다만 같이 임관받은 요시쓰네에 대해서는 비난하지 않고 있다). 가게토키의 서신 외에도, 노리요리의 관할에 대한 월권 행위나 휘하 토고쿠 무사들에게 대한 독단적 처벌 등 요시쓰네의 전횡을 호소하는 보고가 들어왔고, 5월에는 고케닌들에게 ‘요시쓰네를 따르지 말라’는 영이 내려졌다.
그 무렵 요시쓰네는 다이라노 무네모리 · 기요무네(淸宗) 부자를 거느리고 사가미로 개선했지만, 요리토모는 그의 가마쿠라 입성을 허락하지 않고 무네모리 부자만을 가마쿠라에 들였다. 고시고에(腰越)에 머무르면서 요시쓰네는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기를 청하는 편지를 오에노 히로모토편으로 요리토모에게 보내지만(고시고에장腰越狀), 요리토모는 무네모리와의 면회가 끝난 뒤 요시쓰네를 끝내 가마쿠라에 들이지 않은 채, 6월 9일에 무네모리 부자와 다이라노 시게히라의 호송 및 교토 귀환을 명한다. 요리토모를 깊게 원망하게 된 요시쓰네는 급기야 "간토에 원한을 품은 자, 요시쓰네에게 오라"고 말해버렸고, 이를 들은 요리토모는 요시쓰네의 영지를 모조리 몰수했다.
이후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는 오미에서 무네모리 부자를 처형하고, 시게히라는 도다이사로 보냈다.[136]1185년 8월 4일, 요리토모는 일찍이 요시나카를 따랐던 숙부 유키이에의 추토를 사사키 사다쓰나(佐佐木定綱)에게 명했다. 9월에 들어간 교토의 요시츠네에게도 유키이에 추토를 돕게 하도록 가지와라노 가게스에(梶原景季)를 보냈을 때, 야위어 쇠약해진 몸으로 가게스에 앞에 나타난 요시쓰네는 유키이에 추토 요청에 자신의 병, 그리고 유키이에가 같은 겐지임을 들어 거절했다.
1185년 10월에 이 보고를 전해받은 요리토모는 요시쓰네와 유키이에가 서로 내통하고 있다고 판단, 게닌인 도사노보 쇼슌(土佐坊昌俊)을 교토에 보내 요시쓰네를 처단하려 했다. 이에 요시쓰네는 요리토모 추토의 칙허를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요구한다. 10월 17일, 요리토모의 명을 받은 도사노보 등 60여 기가 교토의 호리카와 저택을 습격했으나, 응전하는 요시쓰네에 유키이에가 가세해 습격은 실패했다(호리카와 야토). 요시쓰네는 도사노보가 요리토모의 명을 받고 왔음을 확인하고, 다시 조정에 요리토모 추토의 선지를 요구해 그것을 받아낸다. 10월 24일 요리토모는 겐지 일문과 많은 고케닌들을 모아 아버지 요시토모의 보리사인 쇼죠슈인의 낙성 공양식을 열었다.
그 날 밤, 조정의 요리토모 추토의 선지에 맞서 고케닌들에게 즉시 상경 명령을 내렸지만, 그 때 가마쿠라에 모여 있던 2,098명의 무사 가운데 그 선지에 응한 사람은 불과 58명이었다. 요리토모는 직접 출진을 결정하고 유키이에와 요시쓰네를 토벌하고자 29일에 가마쿠라를 출발, 1185년 11월 1일에 스루가 국의 기세 강에 진을 쳤다. 한편 교토의 요시쓰네는 요리토모 추토의 군사가 모이지 않자, 1185년 11월 3일 유키이에와 함께 싸우지 않고 가신들과 교토를 떠났다.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향하던 요시쓰네는 바다 위에서 폭풍을 만나 선단은 난파되고 일행은 뿔뿔이 흩어져 행방이 불투명한 가운데, 요시쓰네의 애첩 시즈카 고젠(靜御前)이 요시노 산에서 잡혔다. 또한 요시쓰네를 규슈로 맞이하고자 오카 성을 쌓고 있던 분고의 오가타 고레요시(緒方惟榮)가 고즈케국 누마타(沼田)에 유배되면서 분고는 일시에 간토고분고쿠(關東御分國)[137]가 되었다.
1185년 11월 8일, 요리토모는 교토에 사자를 보내고, 기세 강을 떠나 가마쿠라로 돌아왔다. 11월 상순에 요시쓰네·유키이에가 없는 교토에 들어온 토고쿠 무사들의 태도는 강경했다. 법황의 지쿄고쿠인 하리마국으로 가서 법황의 현지 대관을 내쫓고 창고들을 봉인하기도 했다. 이러한 요리토모와 도고쿠 무사들의 분노 앞에 낭패한 조정은 결국 11일, 요시쓰네와 유키이에를 잡아들이라는 선지를 여러 구니에 내린다. 다음 날인 12일에 오에노 히로모토는 앞으로의 일에 대한 처치에 골몰하는 요리토모에게 전국에 슈고 · 지토를 설치할 것을 진언하고, 이에 찬동한 요리토모는 이리저리 당황해하던 조정에 강경한 태도를 비치며 정치적인 공세를 펼쳐나갔다.
24일에 요리토모의 대관으로서 1천 기의 군사를 이끌고 교토로 들어온 것은 호조 도키마사였다. 요리토모의 분노를 법황에게 고하며 가마쿠라측의 요구를 제출하여 법황과의 교섭에 들어갔고, 나흘 뒤인 28일에 도키마사는 고시라카와인의 근신인 요시다 쓰네후사(吉田經房)를 통해 요시쓰네 추포를 명분으로 하는 '슈고 · 지토의 전국 설치'를 조정으로부터 인정받는데 성공했고 가마쿠라의 권력이 일본 전국으로 퍼져나갈 단초를 마련했다. 12월에는 '천하의 초창'을 강조하며, 인 내부의 반(反)가마쿠라파 근신들의 관직 해임과 의주공경(議奏公卿)에 의한 조정 운영, 가네자네를 나이란(內覽)[138]으로 삼는다는 3개 조항의 묘당개혁 요구를 들이댔다.[139].
1186년 3월, 요리토모 추토의 선지를 내린 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법황의 총신이었던 셋쇼 후지와라노 모토미치(藤原基通)가 사임되고, 가네자네가 대신 셋쇼가 되었다. 4월 무렵부터 요시쓰네가 교토 주변에 출몰한다는 풍문이 나돌자, 요리토모는 이 배후에 반가마쿠라파인 인과 여러 귀족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분노하면서도, 도호쿠에도 눈길을 돌려 오슈의 후지와라노 히데히라를 향해 "히데히라는 오쿠 6군(奧六郡)의 주(主), 나는 도카이도의 총관이니 수어지교(水魚之交)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수도에 보내는 말이나 금은 가마쿠라에서 받아 전송하고자 한다."는 서신을 보내 히데히라의 속을 떠보고 있다.
1186년 5월 12일에는 이즈미국에 숨어 있던 유키이에가 잡혀 죽었다. 요리토모는 수사 과정에서 요시쓰네를 숨겨준 사원 세력에 위압을 가해 그들의 행동을 제한했다. 그 사이에 발견된 요시쓰네의 심복 가신들을 체포 및 살해하는 과정에서 요리토모는 인의 근신들과 요시쓰네가 내통하고 있다는 확증을 키워갔다. 11월에는 급기야 "요시쓰네를 체포하지 못하는 원인은 조정에 있습니다. 요시쓰네를 숨겨주면서 요시쓰네와 뜻을 같이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라는 강경한 신청을 행했다. 조정은 또 한 번 요시쓰네 추포의 선지를 내고, 각 사원에서 요시쓰네 체포를 위한 기도를 대규모로 실시하게 했다. 교토로부터 버림받은 요시쓰네는, 다시 한 번 오슈로 피해 후지와라노 히데히라의 비호를 받게 되었다.
가마쿠라의 세력이 오슈에까지 뻗치는 것을 두려워한 후지와라노 히데히라는 1187년 10월, 아들 야스히라(泰衡) 형제들에게 요시쓰네를 장군으로 하여 형제가 합심해 가마쿠라에 맞서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66세로 숨을 거둔다. 이듬해(1188년) 4월에 요리토모는 요시쓰네 추토를 명하는 선지를 다시 한 번 법황에게 요구했고, 요시쓰네를 내놓으라는 선지가 야스히라에게 내려진다. 이에 굴복한 야스히라는 1189년 윤4월, 고로모 강(衣川)의 저택에 있던 요시쓰네를 습격해 자살로 몰아간다.
요시쓰네의 목은 1189년 6월 13일에 가마쿠라에 도착했다. 와다 요시모리와 가지와라노 가게토키가 그 목을 조사하고, 요시쓰네의 목이 분명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25일에는 야스히라 추토의 선지를 조정에 요구하며 고케닌들을 가마쿠라에 모으지만, 칙허는 내려지지 않았다. 요리토모는 오바 가게요시를 불러 "여태 칙허가 없다. 서둘러 고케닌을 불러 모아야 하는데 이를 어찌할까?"라고 묻자, 가게요시는 "군중에서는 장군의 영만 따를 뿐 천자의 조는 듣지 않는 법입니다."라 대답했다. 요리토모는 몹시 기뻐하며 가게요시에게 포상하였다.
그렇게 칙허도 기다리지 않고 1189년 7월 19일, 요리토모는 1천여 기를 인솔하고 가마쿠라를 출발해 야스히라 추토에 나섰다. 25일에는 우쓰노미야에 도착해 우쓰노미야 대명신(宇都宮大明神)[140]에게 전승을 기원하는 한편, 앞서 요리토모에게 패해 도망쳤던 사타케 히데요시 등이 군에 가세했다.
1189년 8월 7일부터 10일에 걸쳐 아쓰카치 산(阿津賀志山)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후지와라노 구니히라를 죽이고 요리토모는 더욱 전진하여 야스히라를 쫓아 북상한다. 22일에 오슈 후지와라씨의 본거지인 히라이즈미(平泉)의 야스히라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 야스히라는 이미 저택을 불사르고 도망친 뒤였다. 요리토모는 조정에 전황을 알리는 사자를 보낸 뒤 야스히라의 수색을 실시했다. 26일, 야스히라는 요리토모에게 서신을 보내 목숨을 구걸하며 답신은 히나이 군(比内郡)에서 듣겠노라는 말을 했다. 서신을 받은 요리토모는 히나이 군에 야스히라 수색을 명하고 9월 2일에는 이와이 군(岩井郡) 구리야가와(厨河)로 진을 옮겼다.[141] 요리토모가 진을 구리야가와로 옮긴 다음날, 야스히라는 부하 가와타노 지로(河田次郞)의 배반으로 죽음을 맞았다. 6일에 가와타노 지로가 야스히라의 목을 가지고 요리토모 앞에 나타났다. 야스히라의 목이 틀림없는지를 확인하게 하는 한편, 요리토모는 가와타노 지로를 '주인을 토벌한 불의'를 물어 처형하게 한다. 야스히라 토벌을 명하는 조정의 선지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의 일이었다.
구리야가와로 돌아온 요리토모는 오슈 후지와라 씨가 건립한 주손지(中尊寺) · 모쓰지(毛越寺), 우지(宇治)의 뵤도인을 본떠 지은 무량광원(無量光院) 등의 사원을 보호하도록 명했다. 히라이즈미에 돌아온 뒤에는 여러 절을 참배하고 감명을 받아, 가마쿠라로 돌아온 뒤 주손사 경내의 오초슈인(大長壽院)을 본뜬 영복사(永福寺)를 짓기도 했다. 24일에는 가사이 기요시게(葛西淸重)에게 히라이즈미의 치안 유지를 명함과 동시에, 다테 군(伊達郡) · 이와이 군(磐井郡) · 오시카 군(牡鹿郡) 등을 영지로 주었다. 27일, 아베노 요리토키(安倍賴時)가 살았던 고로모 강의 옛 터를 방문하고 28일에 히라이즈미를 출발해, 1189년 10월 24일에 가마쿠라에 돌아왔다.
2. 5. 세이이타이쇼군 임명과 만년
겐큐 3년(1192년) 3월, 고시라카와인이 세상을 떠나자 그해 7월 12일에 요리토모는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었다.[142] 일반적으로 일본사에서 가마쿠라 막부의 성립은 요리토모가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된 이 해를 시작으로 보고 있다.
겐큐 4년(1193년) 5월 28일, 요리토모는 고케닌들을 모아 스루가에서 사냥을 실시했는데, 그날 밤 고케닌인 구도 스케쓰네(工藤祐經)가 소가 형제의 복수로 살해되는 사건이 터졌다.[143] 이 사건으로 노리요리가 요리토모에게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8월 2일, 요리토모 앞으로 모반한 적이 없다는 노리요리의 서약문이 도착했지만, '미나모토(源)'라는 성씨를 자칭한 것에 더욱 요리토모의 격노를 샀다.[143] 결국 노리요리는 이즈로 유배되었다가 나중에 주살되었다. 겐큐 5년(1194년)에는 가이 겐지의 야스다 요시사다가 처형되었다.
겐큐 6년(1195년) 2월, 요리토모는 도다이지 재건 공양에 참석하기 위해 부인 마사코, 요리이에, 오히메 외의 자녀들을 데리고 다시 교토로 향했다. 맏딸 오히메를 고토바 천황의 비로 삼고자 조정에 입궁 운동을 시작했지만, 정치적 동지였던 구조 가네자네가 이미 딸 닌시(任子)를 입궁시킨 상태였다. 요리토모는 가네자네의 정적이었던 쓰치미카도 미치치카나 단고노 쓰보네[144]와 접촉하여 오히메의 입궁을 위한 공작에 들어갔다.[145] 그러나 겐큐 8년(1197년) 7월에 오히메가 요절하면서 입궁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겐큐 9년(1198년) 정월, 고토바 천황은 태자 다메히토 친왕에게 양위하고 상황이 되었다. 요리토모는 차녀 산반히메(三幡姬)의 입궁을 기획하고 뇨고(女御)의 선지를 받아냈지만, 같은 해 12월 27일, 사가미 강 다리 낙성식 공양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크게 부상을 입는다. 겐큐 10년(1199년) 1월 11일에 출가하여 13일에 서거하였다. 향년 53세였다(만 51세).
요리토모의 사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다.
요리토모의 사인에 대한 여러가지 설
설
내용
사료
비고
낙마설
사가미 강 다리 낙성식 후 귀가 도중 낙마
{{lang|ja|吾妻鏡|아즈마카가미|}
}
|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이나, 사망 13년 후에 기술됨.
|-
| 당뇨병설
| 飲水の病|음수의 병|물을 갈망하는 병일본어
| 猪隈関白記|이구마관백기|일본어
| 증상 기록이 없어 가능성 낮음.
|-
| 요붕증설
| 낙마로 뇌 중추 신경 손상, 바소프레신 분비 이상
| -
| 소변량 급증, 대량 섭취, 혈중 나트륨 농도 저하
|-
| 망령설
| 義経|요시쓰네일본어나 安徳天皇|안도쿠 천황일본어의 망령을 보고 기절
| 保暦間記|호력간기|일본어
| 의식 장애와 같은 실조증 해석 가능
|-
| 익사설
| 물과 관련된 어휘가 많음
| -
| 근거 없는 추측
|-
| 암살설
| 北条氏|호조씨일본어의 수은 음독 등
| -
| 근거 없음
|-
| 오인 살상설
| 애인 집 야합 중 오인되어 칼에 맞음
| -
| 근거 없고, 관련 인물 특정 불가
|}
3. 가마쿠라 막부
요시카타는 헤이시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1183년 7월에 헤이시 일문을 도쿄에서 몰아냈다. 조정에서는 헤이시 토벌의 상벌에 대해 논의했고, 요리토모는 교관 임명에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68]1183년 8월 10일 요시카타는 좌마두 에치고 수에 임명되었지만, 요리토모는 1183년 10월 9일에 헤이지의 난으로 중단되었던 종오위하의 위계에 복귀했다.[69]
요시카타는 고시라카와 법황에게서 헤이시 토벌의 명을 받았지만, 통제되지 않은 군세와 황위 계승 개입으로 반감을 샀다.[62] 조정과 교토 백성들은 요리토모의 상락을 바랐고, 고시라카와 법황은 요리토모에게 상락을 요청했다. 요리토모는 가마쿠라가 공격받을 위험과 교토의 수용 능력 부족을 이유로 거절했다. 1183년 10월 14일, 조정은 도카이도와 도산도의 영지를 원래 본소로 돌려주고 그 지역의 연공·관물을 요리토모가 진상하며,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의 처벌을 요리토모가 행한다는 내용의 주에이 2년 10월 선지를 내렸다.[62] 이로써 가마쿠라 정권은 조정에게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세력이 되었다.
1184년 1월 요시카타는 정동대장군에 임명되었지만, 우지가와 전투와 아와즈 전투에서 패배하고 토벌당했다. 요리토모는 1184년 3월 27일 정사위하로 서위되었고,[39][62] 이 정보는 1184년 4월 10일에 가마쿠라의 요리토모에게 전달되었다.[39][69]
1185년 4월, 가게토키에게서 요시쓰네를 탄핵하는 서신이 도착했다.[75] 요리토모는 요시쓰네의 가마쿠라 입성을 허락하지 않고, 요시고에조(腰越状)를 보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요리토모는 요시쓰네의 소령을 몰수했다.[39]
1185년 10월, 요리토모는 요시쓰네를 주살하기 위해 토사보 쇼슌을 보냈지만 실패했다. 요시쓰네는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요리토모 토벌의 선지를 받았다. 요리토모는 고케닌들에게 즉시 상락을 명했지만, 응한 자는 적었다. 요리토모는 직접 출진하여 요시쓰네와 유키이에를 토벌하기로 결정했다. 요시쓰네와 유키에는 서국으로 도망쳤지만, 폭풍우를 만나 뿔뿔이 흩어졌다.
1185년 11월 28일, 분지의 칙허를 통해 요리토모는 전국에 슈고와 지토를 설치할 권한을 얻었다.[39]
3. 1. 성립 배경
요시쓰네가 평가(헤이케)를 몰아내기 위해 교토를 떠난 후, 겐랴쿠(元暦) 원년(1184년) 2월 7일 이치노타니 전투에서 승리하고 평 시게히라(平重衡)를 사로잡아 교토로 돌아왔다.[62][39] 요리토모는 요시쓰네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교토에 남겨두고, 요시쓰네의 지휘 아래 기나이(畿内) 무사들을 장악했다. 한편, 시코쿠로 도망친 평가를 토벌하기 위해 규슈와 시코쿠의 무사들에게 평씨 토벌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리고 토비 사네히라(土肥実平)와 가게와라 가게토키(梶原景時)를 산요 각지에 파견했다.[39]
1184년 6월 5일, 평 요리모리(平頼盛)가 관직에 복귀하고,[70] 이치조 요시야스(一条能保), 범라이(範頼), 미나모토 히로쓰나(源広綱), 히라가 요시노부(平賀義信)가 국사(国司)가 되었다.[39] 같은 해 8월 8일, 범라이를 대장으로 하는 평가 토벌군이 가마쿠라에서 출발했다. 호조 요시토키(北条義時), 아시카가 요시카네(足利義兼), 지바 쓰네타네(千葉常胤), 미우라 요시즈미(三浦義澄), 유키 아키미쓰(結城朝光), 히키 요시카즈(比企能員), 와다 요시모리(和田義盛), 아마노 엔케이(天野遠景) 등이 종속된 가신들이었다. 요리토모는 범라이에게 교토에 머무는 것을 금지했고, 토벌군은 27일에 교토에 들어가 29일에 평가 토벌사의 관부(官符)를 받고, 9월 1일에 세이카이로 향했다.[39]
1184년 10월 6일, 요리토모는 구몬쇼(公文所)를 열고 오에 히로모토(大江広元)를 별당(別当)에 임명했다. 구몬쇼는 나중에 만도코로(政所)로 이름을 바꾸고, 이후 가마쿠라 막부에서 정무와 재정을 담당하게 된다.[39] 같은 달 20일에는 소송을 담당하는 몬주쇼(問注所)를 열고, 산젠 야스노부(三善康信)를 집사(執事)로 임명한다.[39] 이 무렵, 니카이도 기미마사(二階堂行政), 평 모리토키(平盛時) 등 중하급의 유능한 관리들이 재능을 발휘할 곳을 찾아 가마쿠라로 내려오게 되고, 그들이 막부 초기 관료 조직을 형성했다.
분지(文治) 원년(1185년) 1월 6일, 세이카이의 범라이로부터 병량과 배 부족, 간토(관동)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동국 무사들의 불화 등 어려운 상황을 호소하는 서신이 도착했다. 요리토모는 안토쿠 천황(安徳天皇)과 겐레이몬인(建礼門院)의 안전을 위해 군을 움직이지 말고 규슈의 무사들로부터 반감을 사지 않도록 기록한 서신을 보냈다. 그리고 규슈의 무사들에게는 범라이를 따라 평가를 토벌할 것을 요구했다.[39]
3. 2. 제도와 통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가마쿠라 막부를 세우면서 여러 제도와 통치 방식을 확립했다. 1183년(주에이 2년), 요리토모는 조정으로부터 도카이도와 도산도 지역의 영지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그 지역의 세금을 요리토모가 바치며,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를 처벌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를 통해 가마쿠라 정권은 조정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세력이 되었다.[62]
요리토모는 자신의 가신들을 '고케닌'이라 부르며, 이들을 각 지역의 슈고와 지토로 임명하여 전국적인 지배 체제를 구축했다. 주요 가신들로는 호조 도키마사, 아다치 모리나가, 미우라 요시즈미, 와다 요시모리, 지바 쓰네타네, 가지와라 가게토키 등이 있었다. 또한, 오에 히로모토, 미요시 야스노부와 같은 문신들을 등용하여 행정 체계를 정비했다.
요리토모는 1184년(겐랴쿠 원년)에 구몬쇼(公文所)와 몬주쇼(問注所)를 설치하여 행정과 사법 기능을 강화했다. 구몬쇼는 오에 히로모토를 별당으로, 몬주쇼는 미요시 야스노부를 집사로 하여 운영되었다.[39] 1185년(분지 원년)에는 분지의 칙허를 통해 전국에 슈고와 지토를 설치할 권한을 얻어 막부의 지배력을 더욱 강화했다.[39]
요리토모의 통치 방식은 무사 중심의 질서를 확립하고 중앙 집권적인 권력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는 고케닌과의 주종 관계를 통해 충성심을 확보하고, 반대 세력을 억압하며 권력을 유지했다.
아노 마사나리, 미나모토노 요시쓰네, 다케다 노부미쓰, 미나모토노 요리타카, 와카쓰키 요리타네
3. 3. 한국과의 관계
頼朝일본어는 분지 2년(1186년)에 일본 각지로부터 분쟁 관련 소송을 많이 받았으며, 타이라노 시게히라에 의해 불탄 동대사 재건 공사도 담당했다.[80]
4.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유산과 평가
《헤이지 이야기》에는 "나이답지 않게 점잖다", 《겐페이 성쇠기》(源平盛衰記)에는 "얼굴은 크고 용모는 아름답다" 등으로 기술되어 있다. 1183년 요리토모와 대면했던 나카하라노 야스사다(中原泰定)는 《헤이케 이야기》에서 "얼굴이 크고 키는 작다. 용모는 몹시 아름다우며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구조 가네자네는 《교쿠요》에 "요리토모의 몸은 위세가 있고 엄숙한데, 그 성품은 강렬하며 성패가 분명하고 다스림에는 끊음이 분명하지 않다."(10월 9일조)고 적었다. 요리토모의 키는 오야마즈미 신사에 봉납된 그의 갑주로 추측해볼 때 165cm 정도로 당시 평균보다 꽤 큰 편이다.
교토 진고사(神護寺)에 소장된 초상화는 오래전부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 전해져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1995년 미술사학자 요네쿠라 미치오(米倉迪夫)는 이것이 실제 요리토모의 초상화가 아니라는 주장을 제기했다.[146] 화법이나 복장을 볼 때 요리토모가 아니라 무로마치 막부의 초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를 그린 것이라는 학설이 발표된 이래, 초상화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시나노 젠코지에 소장된 목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좌상. 일본에 현존하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조각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에는 요리토모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는 목상이 전해지는데, 에도 시대에는 이것이 요리토모상으로 여겨졌고 지금은 도쿄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가이 젠코지(甲斐善光寺)에 소장된 '목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좌상'은 센고쿠 시대에 시나노젠코지(信濃善光寺)에서 옮겨진 것으로, 1319년에 조각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요리토모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요리토모 휘하의 도고쿠(東国) 무사단은 독립심이 강하고 동족 수준의 단결 외에는 하나의 거대 조직으로 결집할 줄 몰랐으며, 싸움에서는 각자 공명을 세우려다 분열되어 격파되곤 했다. 요리토모는 이들을 고케닌으로 정리했다. 《아즈마카가미》에는 요리토모가 고케닌 한 명 한 명의 용모를 모두 숙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화, 전투 결과를 예측하고 적중시킨 일화, 측근 후지와라노 도시카네(藤原俊兼)의 사치를 꾸짖는 일화 등이 실려있다. 이를 통해 요리토모가 인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능력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후지 강(富士川) 전투에서 12세 아들 요리이에가 사슴을 쏘아 맞춘 것을 보고 뛸 듯이 기뻐하며 아내 마사코에게 자랑했다가 "무사의 자식이라면 당연한 것 아닙니까?"라는 핀잔을 받았다. 요리토모는 직접 전선에 나아가 싸운 적은 별로 없지만, 이시바시 산 전투(石橋山の戦い)에서는 갑옷으로 중무장한 무사를 화살 한 발로 넘어뜨리는 등, 삼촌 미나모토노 다메토모(源為朝)만큼 강궁을 다루었다. 승려 지엔(慈円)과 친교가 있어 자주 와카(和歌)를 주고받았으며, 그 노래가 《신고킨와카슈(新古今和歌集)》에 수록되기도 했다.
조지 베일리 샌섬(George Bailey Sansom)은 "요리토모는 진정으로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의 예지는 놀라웠지만, 자신의 확장되는 권력에 맞춰 기계장치를 설치한 그의 실용적인 분별력 또한 놀라웠다."라고 평가했다. 요리토모의 아내 가문인 호조 씨는 요리토모 사후 권력을 장악하여 1333년까지 섭정(摂政, 시켄(shikken))이라는 칭호 아래 쇼군 직을 유지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묘로 여겨지는 석탑은 시라하타 신사(白旗神社) 옆에 보존되어 있으며, 오쿠라 막부(大蔵幕府)가 있었던 장소로 여겨지는 곳에서 가깝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상(나카무라 후세키 화)
1183년미나모토노 요시나카는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헤이시 토벌 명을 받았지만, 통제되지 않은 군세, 기근, 황위 계승 개입 등으로 조정을 비롯하여 교토 백성들의 반감을 샀다. 요리토모는 상락 요청을 거절하고, 주에이 2년 10월 선지를 통해 가마쿠라 정권의 공식적 인정을 받았다. 1183년 호주지 전투(法住寺合戦)이후, 1184년 요시나카는 우지가와 전투와 아와즈 전투(粟津の戦い)에서 토벌당했다. 같은 해 요리토모는 요시타카를 제거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의 전9년의 역을 본따 오슈에서 무가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다.[81][82]1186년 요리토모는 후지와라 히데히라에게 도카이도도산도 지배권을 이유로 오슈 연공 대납을 제안하여 승낙받았다. 1187년 히데히라 사후, 1189년 후지와라 야스히라를 토벌하기 위한 오슈 전투가 벌어졌다. 1189년 요리토모는 칙허 없이 가마쿠라를 출발하여 야스히라 토벌에 나섰다.
1189년 이시나사카 전투(石那坂の戦い)와 아즈가시야마 전투(阿津賀志山の戦い)에서 승리한 요리토모는 1189년히라이즈미를 공략했다. 1189년 야스히라는 가와다 지로(河田次郎)에게 배신당해 죽고, 요리토모는 가와다 지로를 참형에 처했다. 요리토모는 구리카와 척(栗河柵)에서 옛 전9년의 역의 고사를 재현했다. 1189년 요리토모는 주손지(中尊寺) 등 사찰 영토를 안정시키고, 가사이 기요시게(葛西清重)를 오슈 총봉행(奥州総奉行)에 임명하여 오슈 지배 체제를 확립한 후 1190년 가마쿠라로 귀환하였다. 오슈 전투에는 전국 각지의 무사가 동원되었고, 요리토모는 미나모토노 요리요시의 선례를 제시하며 무사들과의 종속 관계를 강화했다. 이 전투로 지쇼・주에이의 난부터 이어진 내란이 종결되었다.
요리토모가 개척한 무가 정권은 제도화되어 조정으로부터 실권을 빼앗고, 막부로 명명되어 왕정복고(1868년)까지 약 680년간 지속되었다. 요리토모는 수호지토 제도로 전국 지배의 토대를 마련했다. 무가 정권의 대표 지위가 정이대장군이라는 관습, 겐지가 그 지위에 취임해야 한다는 관념 등도 요리토모로부터 시작되었다.
4. 1. 긍정적 평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바쿠후라는 이름으로 처음 고안한 무사정권은 점차 제도화되어 조정으로부터 실권을 빼앗았고, 1865년까지 약 680년에 걸쳐 지속되었다. 바쿠후 정권의 창시자로서 요리토모의 실적은 일본 역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의무교육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라는 통치자의 이름을 배우고 있다.[147]
인격적으로는 '비정하고 냉혹한 정치가'로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요리토모는 생전에 요시쓰네를 비롯해 많은 동족과 형제를 죽였을 뿐 아니라, 바쿠후의 최고 사령관인 정이대장군이면서도 직접 군사를 이끈 적은 드물었다.[147] 주로 정치적 교섭으로 가마쿠라 막부의 수립을 완수했다. '비극의 영웅'으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막내동생 요시쓰네를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이라는 이유로, 요리토모의 인기는 그 실적에도 불구하고 높지 않으며 소설이나 만화에서 주인공으로 그려지는 일도 적다.[148]
다음은 요리토모에 대한 여러 인물들의 평가이다.
'''호조 마사코와 휘하 고케닌들''': 요리토모 사후 조큐의 난에서 호조 마사코는 고케닌들에게 "돌아가신 우다이쇼군(요리토모)께서 조적을 멸하고 간토를 여신 이래로 관위며 녹봉, 그 은혜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습니다.... 은혜를 알고 이름을 아끼는 자라면 어서 불충의 참신을 쳐서 은혜에 보답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고, 고케닌들은 눈물을 흘리며 보은을 맹세했다.
'''《보력간기》''':[149] 요리토모 죽음의 원인을 그가 죽인 미나모토노 요시히로, 요시쓰네, 유키이에 및 안토쿠 천황의 망령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신황정통기》에서 "일신의 전력을 기울여 난을 평정하였다. 왕실은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더라도 수도의 전란은 진정되고 만민의 부담도 가벼워졌다. 윗사람도 아랫사람도 병화에 쫓기는 근심이 사라지고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요리토모의 덕을 칭송하였다."고 칭찬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무변독문서》에 의하면, 히데요시는 쓰루가오카 하치만구 시라카타 신사에 모셔진 요리토모상 앞에서 "나와 당신, 모두 미약하고 작은 몸으로 천하를 평정했소이다. 허나 당신께서는 천황의 후윤이시고... 난 성씨도 계도도 없이 천하를 잡았으니 당신보다는 내가 더 뛰어나외다. 허나 당신과 나는 천하의 친구올시다."라고 말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요리토모의 업적이 실려있는 《아즈마카가미》를 모아 필사하도록 했다. 이에야스는 요리토모를 몹시 숭배해, 《아즈마카가미》를 읽으며 요리토모의 행적을 배웠다고 한다.
'''아라이 하쿠세키''': 《독사여론》에서 요리토모의 정치적 공적에는 일정한 평가를 주되, 요리토모의 행동은 조정을 얕보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 것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처럼 정치적 능력에 대한 평가는 높지만, 논평자의 관점에 따라 전체적인 평가가 오르내리는 경향이 있으며, 시대에 따라서도 평가가 요동치는 것이 특징이다.
4. 2. 부정적 평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바쿠후(幕府)라는 무사정권을 창시하여, 1865년 왕정복고까지 약 680년간 지속된 무사정치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일본 역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의무교육을 통해 요리토모의 이름을 배운다.[148]
그러나 요리토모는 인격적으로 '비정하고 냉혹한 정치가'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148] 그는 생전에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를 비롯한 많은 동족과 형제를 죽였고,[148] 세이이타이쇼군이었음에도 직접 군사를 이끈 적이 드물었으며,[147] 주로 정치적 교섭을 통해 가마쿠라 막부를 수립했다. 특히 '비극의 영웅'으로 인기 있는 요시쓰네를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이라는 점 때문에, 요리토모의 인기는 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높지 않으며, 소설이나 만화의 주인공으로 그려지는 일도 적다.[148]
다음은 요리토모에 대한 여러 평가들이다.
'''호조 마사코와 휘하 고케닌들''': 요리토모 사후 조큐의 난에서 마사코는 고케닌들에게 요리토모의 은혜를 강조하며 충성을 촉구했고, 고케닌들은 눈물을 흘리며 보은을 맹세했다. 이는 요리토모에 대한 높은 평가를 보여준다.
'''《보력간기(保曆間記)》''':[149] 요리토모가 죽인 인물들과 안토쿠 천황의 망령이 그의 죽음의 원인이라고 기록하여, 그가 많은 죄를 지었다고 평가했다.
'''아라이 하쿠세키''': 그의 저서 《독사여론(讀史餘論)》에서 요리토모의 정치적 공적은 인정하지만, 조정을 얕보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다고 비판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요리토모의 업적을 칭찬하면서도, 그의 성공이 혈통에 의존한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강항''': 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조선 성리학자 강항은 《간양록》에서 요리토모가 일본을 전쟁의 시대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이처럼 요리토모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능력은 높게 평가되지만, 평가자의 관점(근왕파 여부, 유교적 윤리관 등)과 시대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경향을 보인다.
4. 3. 종합적 평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바쿠후'(幕府)라는 무사정권을 처음으로 고안하여 제도화했고, 이는 1865년 왕정복고까지 680년간 지속되었다. 이 업적으로 일본 역사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의무교육을 통해 그의 이름을 배운다.[147]
그러나 인격적으로는 '비정하고 냉혹한 정치가'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요리토모는 동생 요시쓰네를 비롯한 많은 동족과 형제를 죽였고,[148] 세이이타이쇼군이면서도 직접 군사를 이끈 적은 드물었으며, 주로 정치적 교섭으로 가마쿠라 막부를 수립했다.[147] '비극의 영웅'으로 인기 있는 요시쓰네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요리토모의 인기는 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높지 않으며, 소설이나 만화의 주인공으로 그려지는 일도 적다.[148]
다음은 요리토모에 대한 여러 인물들의 평가이다.
호조 마사코와 고케닌들: 요리토모 사후 조큐의 난 때, 호조 마사코는 고케닌들에게 요리토모의 은혜를 강조하며 충성을 요구했고, 고케닌들은 눈물로 보은을 맹세했다. 이는 요리토모에 대한 높은 평가를 보여준다.
《보력간기(保曆間記):[149] 요리토모의 죽음을 그가 죽인 인물들의 망령 때문이라고 기록하여, 당시부터 그가 '많은 죄를 지은' 것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에서 "왕실은 옛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았더라도 수도의 전란은 진정되고 만민의 부담도 가벼워졌다."며 요리토모의 공적을 칭찬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무변독문서(武辺咄聞書)》에 따르면, 히데요시는 요리토모의 업적을 칭찬하면서도, 그의 성공이 혈통에 의존한 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요리토모의 업적이 담긴 《아즈마카가미》를 필사하게 하고, 요리토모를 숭배하며 그의 행적을 배웠다고 한다.
아라이 하쿠세키: 《독사여론》(讀史餘論)에서 요리토모의 정치적 공적은 인정하면서도, 그의 행동이 조정을 얕보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 것이라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강항:임진왜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조선 성리학자 강항은 《간양록》에서 일본의 혼란이 요리토모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비판했다.
이처럼 요리토모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 능력은 높게 평가되지만, 논평자의 관점이나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경향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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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문서
고사기 및 일본서기의 도요키이리비코노 미코토 관련 기록 및 학설
[141]
문서
지금의 모리오카시인 구리야가와는 일찍이 전9년의 역에서 요리토모의 선조 미나모토노 요리요시가 아베노 사다토 등을 토벌한 땅으로, 그 가례를 모방해 구리야가와에서 야스히라를 토벌하고자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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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토모가 곤노다이나곤·고노에노다이쇼 직을 필사적으로 사임한 것은 이들 관직 모두 교토 조정의 공사 운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지위에 있었으며, 조정의 공적인 일에 참가할 의무가 있었던 이들 관직을 사임하지 않고는 가마쿠라로 돌아올 수 없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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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토모는 당시 남관동 무사정권 내부에서의 논공행상 문제로 일부 친족들에게만 '미나모토' 성씨를 쓰는 것을 허락하고 있었다. 이를 고몬후타쓰라고 한다.
[144]
문서
고시라카와 법황의 후궁.
[145]
문서
겐큐 7년(1196년) 11월, 가네자네는 미치치카의 모략을 받고 일족과 함께 실각했으며, 요리토모는 이를 묵인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역사에서는 이를 '겐큐 7년의 정변'이라 부르며, 이는 반(反)막부파의 대두를 초래해 조큐의 난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다.
[146]
서적
그림은 말한다(4)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상 침묵의 초상화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상ㅡ침묵의 초상화
헤이본자
1995-00-00 / 2006-00-00
[147]
문서
요리토모 자신의 무예는 뛰어났지만 전투 지휘관으로서는 두드러지는 실적을 드러낸 적이 없다.
[148]
서적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세계
[149]
서적
(제목 없음)
1339-00-00
[150]
서적
교쿠요
[151]
서적
아즈마카가미
1192-08-17
[152]
서적
아즈마카가미
1192-08-03
[153]
서적
아즈마카가미
1195-04-30
[154]
문서
조큐의 난에 대한 기록.
[155]
서적
아즈마카가미
1199-00-00
[156]
문서
기록에서 말한 '음수병(飮水病)'은 풀이하면 '물 마시는 병', '물을 몹시 찾는 병'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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